[크립토에 열광한 美핀테크]①달러패권 굳히는 스테이블코인 전략
미국이 세계 디지털자산 시장의 중심지로 다시 발돋움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규제법안인 ‘지니어스 액트(GENIUS Act)’를 통과시키며 제도화에 속도를 내고, 증권거래위원회(SEC)의 ‘프로젝트 크립토(Project Crypto)’ 등을 통해 규제 명확성을 높여 시장 주도권을 확보하는 모양새다. 핀테크 산업 행사 ‘머니 20/20’이 열린 라스베이거스를 찾아 미국 내 크립토 열기와 시장의 급변하는 흐름을 살펴봤다.[편집자]

[미국 라스베이거스=편지수 기자] 스테이블코인은 가상자산 시장에서 일종의 ‘기축통화’ 역할을 하기 위해 등장했다. 법정화폐와 페깅(pegging·연동)되어 가격 변동성이 낮으면서도, 법정화폐 입출금 과정을 거치지 않고 여타 가상자산처럼 거래할 수 있어 중간 거래수단으로 각광받았다. 이후 법정화폐의 가치가 불안정한 신흥국에서 안정적인 통화에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난 2020~2021년 터키 리라화의 가치가 폭락했을 때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대안으로 떠오른 게 대표적 사례다.
현재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주축은 테더(USDT), USD코인(USDC) 등 달러를 기반으로 한 코인들이다. 국제 무역과 금융시장에서 널리 사용되는 기축통화인 달러의 신뢰성을 이어받은 데다, ‘친(親) 크립토’ 기조를 가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스테이블코인을 적극 장려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서명한 지니어스 액트(GENIUS Act)에는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발행 규모에 상응하는 현금과 미국 국채 등을 준비자산으로 보유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미국 정부가 스테이블코인을 장려하는 목적은 크게 두 가지다. 달러의 국제적 위상을 확대하고 접근성을 높여 ‘달러 패권’을 강화하고, 준비자산인 미국 국채 수요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미국 재무부 차입자문위원회(TBAC)는 스테이블코인의 확대가 단기 국채의 신규 수요처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6월 기준 테더와 서클이 보유한 미국 국채 규모는 약 1235억달러(한화 164조원)로, 사우디아라비아가 보유한 340억달러(45조원)를 훌쩍 넘어섰다.
결제망 흔드는 스테이블코인…전통 금융도 참전
스테이블코인의 부상은 기존 전통 금융권을 위협하고 있다. 지니어스 액트가 미국 상원을 통과한 후 비자와 마스터카드의 주가가 일제히 떨어진 것이 단적인 예다. 스테이블코인이 신용카드를 대체할 결제수단으로 주목받았다는 의미다. 블록체인 분석업체 알리움의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1~3분기 스테이블코인 결제액은 4820억달러(644조원)로 전년동기대비 45% 늘었다.

전체 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작지만, 빠른 성장세로 외화 송금과 무역거래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라스베이거스 현장에서 만난 한 블록체인 인프라 기업 관계자는 “수 년 전만 해도 주로 디파이(DeFi·탈중앙화금융) 쪽에서 관심을 보였다면, 이제는 은행이나 증권사, 결제기업과 접촉이 더 많다”라고 전했다.
비자, 마스터카드 등 주요 카드 네트워크도 스테이블코인 결제망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 가상자산거래소 코인베이스, 전자상거래 플랫폼 쇼피파이, 핀테크 기업 스트라이프 등과 함께 스테이블코인 프로젝트 ‘오픈 스탠다드’에 참여하고 ‘오픈USD(OUSD)’의 활성화에 나선 것이 그 예다. 국내 기업 중에서는 신한금융그룹, 카카오뱅크, 케이뱅크, KB국민카드, 가상자산거래소 두나무 등이 오픈 스탠다드에 이름을 올렸다.
가상자산 중심지 노린다…크립토 기업도 ‘유턴’
미국 정부의 가상자산 육성 정책은 스테이블코인에 그치지 않는다. 미국 증권거래위(SEC)는 지난해 미국을 세계 가상자산 시장의 중심지로 육성하겠다는 목표 아래 ‘프로젝트 크립토(Project Crypto)’를 발표했다. 가상자산의 증권성 판별 기준인 ‘하위 테스트’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고, 가상자산공개(ICO)나 에어드롭에 대한 새 규정을 제공하는 등 규제 불확실성을 낮췄다. 상장 주식을 퍼블릭 블록체인 위에서 토큰화해 거래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샌드박스 형태의 ‘혁신 면제(Innovation Exemption)’도 도입하기로 했다.
비록 시장구조를 다룬 ‘클래리티 액트(CLARITY Act)’가 미국 상원 통과에 난항을 겪고 있으나, 가상자산 규제를 명확히 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는 확고하다.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가 ‘가상자산 시장 규정(CAM)’이라고 불리는 신규 규제 체계 마련에 나선 것에서도 정부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는 불확실한 규제로 인해 상가포르, 두바이 등 친 크립토 국가로 떠났던 프로젝트들을 다시 미국으로 돌려놓겠다는 ‘온쇼어링(Onshore)’ 계획과 맞닿아 있다. ‘가상자산 허브’로 불리던 싱가포르가 금융거래서비스법(FSMA)을 통해 규제를 강화하자 사업자들의 눈은 다시 미국으로 쏠리고 있다. 올해 초 알고랜드 재단과 지토 파운데이션 등이 각각 싱가포르, 케이맨제도에서 미국으로 복귀하고, 가상자산 플랫폼 ‘넥소(Nexo)’가 미국으로 다시 돌아온 것도 온쇼어링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인공지능(AI)이 사람을 대신해 자금을 운용하는 ‘AI 에이전트 경제’의 부상과 스테이블코인 트렌드가 맞물리면서 세계 최대의 자본시장인 미국으로 수요가 쏠린다는 분석도 나온다. 글로벌 크로스보더 결제업체 관계자는 “탈중앙화(decentralized)로 시작했던 가상자산 시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앙화(centralized)되고 있다”면서 “전통 금융권이 주 무대로 바뀌면서 가상자산 수요도 미국으로 집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